무협소설 써 보았어요 무명지협(無名之俠)1권

무명지협(無名之俠) - 전체 시놉시스 

[제 1부: 용의 각성] - 운명의 시작

  • 1~2장 요약: 낙양의 고아 무영은 선한 마음 하나로 위기에 처한 노파를 돕는다. 그날 밤, 우연히 헛간에 숨어든, '흑영문(黑影門)'에게 쫓기는 절세고수 '검귀(劍鬼)'를 만나게 된다. 검귀는 무영의 순수한 눈빛에서 가능성을 보고, 죽기 직전 자신의 모든 내공과 필생의 무공 **'귀혼천강경(鬼魂天罡經)'**을 강제로 전수하며 숨을 거둔다. 하룻밤 사이에 감당할 수 없는 힘과 위험한 비밀을 짊어지게 된 무영.
  • 그 후의 이야기:
    • 탈출: 무영은 자신의 몸에 깃든 거대한 힘에 경악한다. 그는 검귀의 시신을 수습하여 뒷산에 묻어준 뒤, 검귀를 쫓던 '흑영문'의 추격자들이 낙양에 도착하기 직전, 난생처음으로 정든(?) 낙양을 떠나 미지의 강호로 도망친다.
    • 힘의 폭주: 강호에 첫발을 내디딘 무영은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온갖 소동을 일으킨다. 배고픔에 사과를 따려다 사과나무를 통째로 뽑아버리고,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을 실수로 수십 장 밖으로 날려버리는 등, 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그는 자신의 힘이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 첫 번째 협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곤경에 처하던 중, 산적들에게 약탈당하는 작은 상단(商團)을 목격한다. 그는 또다시 외면하지 못하고, 어설프게나마 귀혼천강경의 초식을 흉내 내 산적들을 물리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힘이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한 힘을 쓸 때 비로소 내공이 제어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그는 상단주에게서 "어느 문파의 대협이신지"라는 질문을 받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강호에 '정체불명의 실력자가 나타났다'는 첫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제 2부: 강호 주유] - 인연과 이름

  • 주요 사건:
    • 숙명의 만남, 남궁혁: 무영은 호남(湖南) 땅에서 정파의 명문, 남궁세가의 오만하고 강직한 소가주 남궁혁과 마주친다. 사파에게 쫓기는 백성을 구하는 과정에서 둘의 방식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남궁혁이 '정파의 법도'를 내세우며 절차를 따지는 사이, 무영은 막무가내로 뛰어들어 사람부터 구한다. 이 과정에서 무영의 제어되지 않은 힘이 남궁혁의 검을 부러뜨리는 등, 그에게 굴욕을 안긴다. 남궁혁은 근본 없는 무영을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놈'으로 여기며 적대시한다.
    • 지혜의 조력자, 모용설: 한편, 무영의 기이한 행적은 강호의 모든 정보를 쥐고 있는 녹의상단의 신비로운 여주인 모용설의 귀에 들어간다. 그녀는 흑영문의 추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의도치 않은 선행을 베푸는 무영에게 흥미를 느낀다.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던 무영을 우연히 발견해 치료해주며 첫 인연을 맺는다. 그녀는 무영에게 강호의 정세와 그의 힘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려주며, 그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 '무명지협'의 탄생: 무영은 모용설의 도움과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점차 귀혼천강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제어하기 시작한다. 그는 더 이상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협'을 행한다. 부패한 관리를 응징하고, 사교(邪敎) 집단에 빠진 마을을 구출하는 등, 그의 활약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백성들은 그를 '이름 없는 협객', **무명지협(無名之俠)**이라 부르며 칭송하기 시작하고, 그의 명성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제 3부: 무림의 격랑] - 음모와 진실

  • 주요 사건:
    • 흑막의 계략: 무영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검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흑영문'의 압박도 거세진다. 흑영문의 문주는 바로 현 무림을 뒤에서 조종하는 거대한 흑막, **'천면인(千面人)'**이었다. 그는 귀혼천강경이 사악한 마공(魔功)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무영이 검귀의 마성을 이어받은 '마인(魔人)'이라는 누명을 씌운다.
    • 무림맹의 분열: 부패하고 명분에만 집착하던 기존의 무림맹은 천면인의 계략에 쉽게 넘어간다. 특히 무영에게 악감정이 있던 일부 세력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마인 무영 토벌'을 선포한다. 정파의 이름으로 무영을 쫓기 시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 진실을 향한 투쟁: 남궁혁은 무림맹의 결정에 처음에는 동조하지만, 무영의 행적을 계속 지켜보면서 그가 마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무림맹의 위선과 부패에 환멸을 느끼고, 가문의 반대를 무릅쓴 채 독자적으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 새로운 구심점: 무영은 정파와 사파 모두에게 쫓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의 협의에 감화되었던 수많은 사람들, 무림맹의 부패에 등을 돌린 의로운 군소문파들, 그리고 모용설의 상단 세력과 마침내 진실을 마주한 남궁혁이 그의 곁으로 모여든다. 무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존의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의 구심점이 된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믿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검귀의 원한과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흑영문과 무림맹에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제 4부: 천하제일인] - 협의, 세상을 비추다

  • 주요 사건:
    • 최후의 결전: 무영의 '신흥 연합'과 천면인의 '흑영문', 그리고 부패한 '구(舊) 무림맹' 세력 간의 삼파전이 벌어진다. 이 거대한 전쟁 속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희생되고, 무영은 리더로서의 슬픔과 책임을 통감하며 더욱 성장한다. 모용설의 지략과 남궁혁의 용맹, 그리고 무영의 압도적인 무공과 카리스마가 빛을 발한다.
    • 천면인의 정체: 마침내 무영은 흑막, 천면인과 마주한다. 천면인의 정체는 과거 무림맹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억울하게 희생된, 전대 무림맹주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그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절망하여, 힘으로 세상을 통제하는 자신만의 '질서'를 세우려 했던 것. 그는 무영에게 묻는다. "네놈의 협의와 나의 질서가 무엇이 다른가?"
    • 맹주의 자격: 무영은 천면인과의 치열한 사상적, 무공적 대결 끝에 답한다. "당신의 질서는 공포 위에 서 있지만, 나의 협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무영은 마침내 귀혼천강경을 완벽히 초월한 자신만의 무공, **'무영심결(無影心訣)'**로 천면인을 쓰러뜨린다. 그는 천면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죄를 만천하에 알린 뒤 스스로 죗값을 치를 기회를 준다. 힘이 아닌, 마음으로 상대를 굴복시킨 것이다.
    • 새로운 시대: 전쟁이 끝나고, 구 무림맹은 완전히 신뢰를 잃고 해체된다. 강호의 모든 문파와 세가는 만장일치로 무영을 새로운 무림맹주로 추대한다.
    • 에필로그: 맹주의 자리에 오른 무영. 하지만 그는 화려한 맹주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허름한 옷을 입고, 남궁혁과 모용설과 함께 강호 곳곳의 아픔을 보듬는다. 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맹주 나리'가 아닌, 자신들 곁의 '무명지협'으로 부른다. 이름 없던 고아 소년이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낸 '협의'가 마침내 온 강호를 비추는 태양이 되었음을 보여주며, 대서사의 막이 내린다.

 

제 1부: 용의 각성 (龍之覺醒)


제 1장: 낙양(洛陽)의 그림자

천하의 중심, 모든 길이 통하고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북적이는 인파와 화려한 누각이 하늘을 찌르는 도시, 낙양성(洛陽城).

그 찬란한 빛이 짙을수록, 발밑의 그림자 또한 깊어지는 법이다.

낙양에서 가장 크고 번화하다는 비룡객잔(飛龍客棧)의 뒷골목. 진한 술지게미 냄새와 음식물 쓰레기가 뒤섞인 악취 속에서, 한 소년이 묵묵히 물이 가득 담긴 나무통을 나르고 있었다. 열일곱, 혹은 열여덟쯤 되었을까. 또래보다 유난히 마른 어깨는 무거운 나무통의 무게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소년의 이름은 무영(無影).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다.


객잔의 주인이 아무렇게나 던져준 그 이름처럼, 소년은 객잔 안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수많은 강호인과 상인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누구 하나 소년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존재는 마치 공기처럼 투명했다.

"어이, 거기!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물 채워 와!"

객잔 포두(庖頭)의 고함 소리가 날아와 등에 박혔다. 무영은 짧게 "예"라고 대답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손에는 방금 일당으로 받은,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맨빵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늘 하루 그의 유일한 양식이었다.

우물가로 향하던 무영의 발걸음이 시장 어귀에서 우뚝 멈췄다.

비단 옷을 차려입은 장사치 하나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노파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 참이었다. 노파의 곁에는 겁에 질린 어린 손녀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늙은 것이! 감히 내 가게 앞에서 구걸을 해? 재수 없게!"

주변의 사람들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거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난 듯 멀찍이서 수군댈 뿐이었다. 그것이 낙양의 법도이고, 강호의 현실이었다. 약자는 언제나 짓밟히는 법.

그 순간, 무영은 보았다. 공포에 질려 떨면서도 손녀의 앞을 가로막아 서는 노파의 굽은 등을. 그 모습이 흐릿한 기억 속, 누군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무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맨빵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이 없으면 오늘 밤 내내 굶주림에 시달려야 한다. 저 일에 끼어들었다간 빵은 고사하고 흠씬 두들겨 맞을 것이 뻔했다. 그는 약하고, 힘이 없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외면하면 안 돼.'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 마음속 깊은 곳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무영은 결심했다. 그는 싸울 줄 몰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장사치를 향해 다가가 일부러 비틀거리며 그의 몸에 부딪혔다.

"아이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영이 나르던 물통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며 장사치의 화려한 비단 신을 흠뻑 적셨다.

"아, 죄, 죄송합니다, 나리! 발을 헛디뎌서..."

무영은 땅바닥에 엎드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장사치의 분노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이 천한 놈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게냐! 네놈, 목숨이 몇 개야!"

장사치의 발길이 무영의 어깨를 걷어찼다. 윽, 하는 신음과 함께 무영의 손에서 맨빵이 떨어져 흙탕물 속으로 뒹굴었다. 하지만 무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엎드린 그의 시야 구석으로, 노파가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황급히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으로 되었다.

한참 동안 욕설과 발길질을 퍼붓던 장사치는 분이 풀렸는지 침을 탁 뱉고는 가게로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무영은 흙탕물 범벅이 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걷어차인 어깨가 욱신거렸다. 바닥에는 진흙에 짓이겨져 더는 먹을 수 없게 된 맨빵이 뒹굴고 있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오늘 밤도 굶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허기만큼 시리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온기가 차오르는 듯했다.

무영은 흙탕물에 더러워진 나무통을 들고 다시 객잔의 뒷골목, 자신의 차가운 잠자리인 헛간으로 향했다. 낡은 지붕 틈새로 부서져 들어오는 달빛만이 그의 유일한 벗이었다.

차가운 널빤지에 누운 무영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비록 이름도, 가진 것도 없는 고아지만, 그는 오늘 처음으로 무언가를 지켜냈다. 그 대가는 고작 빵 한 덩이와 몇 번의 발길질뿐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날 밤, 그가 지켜낸 아주 작은 선의(善意)가, 훗날 온 강호를 뒤흔들 거대한 협의(俠義)의 첫걸음이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의 운명이, 바로 오늘 밤, 송두리째 바뀌리라는 것을 말이다.


제 2장: 귀인(奇人), 그리고 기연(奇緣)

차가운 널빤지 위, 욱신거리는 어깨의 통증과 텅 빈 위장의 허기가 무영의 잠을 방해했다. 낡은 헛간 지붕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바닥에 길게 누워, 마치 차가운 강처럼 흘렀다. 무영은 그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낮의 일이 꿈처럼 아득했다. 흙탕물에 뒹굴던 맨빵, 장사치의 경멸 어린 눈빛, 그리고 공포 속에서도 손녀를 감싸던 노파의 작은 등.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털썩.

헛간 구석, 짚더미가 쌓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영은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에 숨을 죽였다. 들짐승인가? 아니면 객잔의 누군가가 들어온 것인가? 그는 널빤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소리가 난 쪽을 꿰뚫을 듯이 노려보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달빛이 조금씩 움직이며, 어둠 속에 쓰러진 인영(人影)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췄다. 그는 피투성이였다. 입고 있는 남색 무복(武服)은 갈가리 찢어져 있었고, 드러난 팔과 옆구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려 짚더미를 적시고 있었다.

남자는 간신히 몸을 돌려 무영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그러나 죽어가는 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형형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패왕(覇王)의 눈빛처럼, 깊고 서늘한 절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무영은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강호의 일에 휘말리면 끝장이다. 객잔에서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었다. 모른 척해야 한다. 이대로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남자의 눈과 마주친 순간, 무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눈은 도움을 구걸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 세상의 마지막을 담담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한마디에 무영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낮에 채워두었던 작은 물동이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따라 그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남자는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다.

"허... 허허..."

갈증을 해결한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무영의 행색과 흙먼지투성이의 얼굴, 그리고 희미하게 부어오른 어깨를 훑어보았다.

"네놈도... 세상에게 버림받은 주제로군.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돕는 게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영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다치셨으니까요."

소년의 꾸밈없는 대답에, 남자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한참 동안 무영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늘을 향해 다시 한번 웃었다. 그 웃음에는 한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 자의 자조(自嘲)가 섞여 있었다.

"그래... 다쳤으니까. 그거면 충분한 이유지. 강호의 대협이라는 놈들은 백 가지 이유를 대며 외면하더니... 하찮은 동냥개 신세가 되어서야 진짜 사람을 만나는구나."

남자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는 자신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나는... '검귀(劍鬼)'라 불렸다.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자부했던 '귀혼천강경(鬼魂天罡經)'을 익혔으나, 믿었던 자들의 배신과 '흑영문(黑影門)' 놈들의 비열한 함정에 빠져 이 꼴이 되었지."

검귀. 무영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으로도,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소년. 내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이대로 죽으면 내 일생의 무학과 원한이 모두 사라지겠지. 그것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겠나."

검귀의 눈이 섬광처럼 빛났다. 그는 피투성이의 손을 뻗어, 피할 틈도 없이 무영의 손목을 낚아챘다. 쇠집게 같은 힘에 무영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네놈의 눈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구나. 욕심도, 야망도 없는 순수한 빛이. 좋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도박이다!"

순간, 검귀의 손바닥에서부터 맹렬한 열기가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크아아악!"

무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몸의 혈관과 뼈마디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거대한 용암 덩어리가 그의 단전(丹田)으로 쏟아져 들어와 온몸의 기맥(氣脈)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평생을 쌓아 올린 검귀의 어마어마한 내공이 강제로 주입되고 있었다.

"견뎌라, 소년! 이 힘은 선(善)도 악(惡)도 아니다! 쓰는 자에 따라 신(神)이 될 수도, 마(魔)가 될 수도 있을 터! 부디... 부디 네놈의 '협(俠)'을 이 힘으로 증명해 보여라...!"

검귀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필생절기인 귀혼천강경의 모든 구결과 초식이 거대한 정보의 파도가 되어 무영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무영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헛간 안은 고요했다. 거짓말처럼 몸의 통증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웠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들렸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 하나하나까지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검귀의 시신만이 누워 있었다.

무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헛간 벽에 기대어 있던 낡은 짚단에 스쳤다.

파사삭-

마치 백 년은 묵은 고목처럼, 짚단이 아무런 힘도 받지 않았는데 바스러져 고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무영은 경악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 안에는 이질적이고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스스로의 것이 아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그의 뇌리에 검귀의 마지막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내 원수들이... 이제 네놈의 원수가 될 것이다.'

이름 없이 살아가던 고아 소년, 무영.
그는 하룻밤 사이에, 강호 제일의 잠재적인 고수이자, 가장 위험한 비밀을 짊어진 도망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미미했던 삶은 이제 끝났다. 거대한 운명의 강이 그의 발밑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제 3장: 이름 없는 자의 도주 (無名者之逃走)

낡은 헛간 지붕의 나뭇결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고, 처마 끝에 매달린 거미줄에 맺힌 작은 이슬방울까지 보였다. 객잔 주방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도마 소리, 수십 장 밖 거리에서 말을 매는 소리까지 귓가에 생생했다. 온몸의 감각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증폭되어 있었다.

그리고 몸 안. 텅 비어 있던 뱃속, 허기만이 가득했던 그곳에 거대한 강(江)이 흐르고 있었다. 스스로의 것이 아닌,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힘. 검귀라 불리던 사내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내공이었다.


무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걷어차여 욱신거리던 어깨의 통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벽에 기대어 있던 낡은 짚단에 스쳤다.

파사삭-

아무런 힘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짚단은 마치 백 년은 묵은 고목처럼, 소리도 없이 바스러져 고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

경악. 그리고 공포. 무영은 황급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손안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때, 싸늘하게 식어버린 검귀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떠났다. 선의도 악의도 없는 힘이라 했다. 쓰는 자에 따라 신(神)이 될 수도, 마(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내 원수들이... 이제 네놈의 원수가 될 것이다.'

뇌리를 스치는 유언에 무영은 몸을 떨었다.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 멀리, 아주 멀리 도망쳐야 한다. 검귀를 쫓던 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하지만 무영의 발걸음은 싸늘한 시신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록 하룻밤의 기이한 인연이었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감당 못 할 짐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진짜 사람'이라 불러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대로 둘 순 없어.'

무영은 결심했다. 그는 헛간 구석에 버려져 있던 낡은 가마니를 가져와 검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객잔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아직 어둠의 장막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새벽녘. 무영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가벼운 몸으로, 하지만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으로 시신을 둘러메고 뒷산으로 향했다.

곡괭이도, 삽도 없었다. 무영은 그저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단단한 흙이 마치 두부처럼 부드럽게 파헤쳐졌다. 몸 안에 흐르는 거대한 강이 그의 손끝으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인 한 명이 눕기에 충분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무영은 검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안치하고 흙을 덮었다. 봉분을 만들고, 그 앞에 작은 돌멩이를 세웠다. 비석(碑石)이었다. 이름도, 아무 글자도 새길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덤.

무영은 땀으로 젖은 이마를 훔치며 무덤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편히 잠드십시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였다. 그의 초인적인 감각이 잡아냈다. 산 아래, 낙양성 입구 쪽에서 수십 필의 말발굽 소리가 정적을 깨고 달려오고 있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대지를 울리는 진동이었다.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살기(殺氣)가 물결처럼 퍼져왔다.

'왔구나!'

무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의 반대편, 낙양의 성벽 너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것이었다.

그의 발이 땅을 한 번 박찰 때마다 몸이 수 장(丈)을 가볍게 날아올랐다. 나무와 바위를 장애물처럼 느끼지도 않고, 바람처럼 숲을 헤쳐나갔다. 귀혼천강경의 신법(身法)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에 새겨져 저절로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낙양성 외곽, 인적 없는 황야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멀리 낙양성 위로 동이 트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도시. 하지만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하아... 하아..."

무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며칠을 굶은 탓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허기와 갈증,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의 눈에 저 멀리,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사과가 보였다. 야생 사과나무였다. 무영은 반가운 마음에 나무로 다가가 가장 먹음직스러운 사과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저 가볍게 잡았을 뿐인데.

우지끈-!

"……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사과 한 알이 아니었다. 어른 팔뚝만 한 굵기의 사과나무 가지였다. 그가 잡은 가지가 통째로 부러져 버린 것이다.

무영은 기겁하며 손에 든 나뭇가지를 내던졌다.

이게 무슨...

그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힘은 저주다. 남을 돕기는커녕,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사과 하나 따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한 저주다.

망연자실. 무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름도, 돌아갈 곳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렸다.

거대한 강호의 한복판에, 그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손안에 천하를 뒤흔들 힘을 쥔 채, 그 힘을 두려워하며 울고 있는 열일곱 소년.

무명지협의 전설은, 바로 그 눈물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강호에 첫발을 내디딘 무영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크고 작은 소동에 휘말리며, 마침내 자신의 힘을 '남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 '첫 번째 협의'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제 4장: 의도치 않은 위명 (意圖치 않은 危名)

낙양을 떠나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 지 사흘째. 무영은 그 사이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강호의 현실은 냉혹했다. 허름한 행색의 고아에게 선뜻 먹을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든 품삯을 받고 일을 해보려 해도, 그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리기 일쑤였다. 물동이는 깨졌고, 장작은 가루가 되었으며, 짐마차의 손잡이는 뽑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재수 없는 놈이라며 손가락질했고, 어떤 이들은 괴력을 지닌 요물이라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무영은 철저히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몸 안에는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처럼 날뛰는 거대한 내공이 함께하고 있었다. 허기는 극에 달했지만, 그 힘 덕분인지 지치는 법은 없었다. 그것이 더 비참했다.

그날 오후, 인적이 드문 산길을 터덜터덜 걷던 무영의 코끝에 고소한 냄새가 와 닿았다. 숲 속 공터에서, 굵은 몽둥이와 무기를 든 장정 대여섯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닭을 굽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선량한 민간인들은 아니었다. 험악한 인상과 거친 말투, 허리춤에 찬 녹슨 칼. 인근을 지나는 행상들을 노리는 산적임이 틀림없었다.

무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닭고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지나가자. 저들과 얽히면 끝장이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산적 중 하나의 고함 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놈 봐라! 어딜 그냥 지나가려고!"

가장 덩치가 큰 산적이 무영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기름 묻은 손으로 무영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네놈, 며칠 굶은 땅그지 꼴을 하고선, 감히 형님들이 식사하시는 곳을 그냥 지나쳐? 통행세를 내야 할 것 아니냐!"

산적들이 낄낄거리며 일어섰다. 그들의 눈은 먹잇감을 발견한 이리처럼 번뜩였다. 통행세는 핑계일 뿐, 심심하던 차에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것뿐이었다.

무영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럼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산적이 무영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무영은 그저 뺨을 가리려고,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 어떤 의도도, 반격의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팔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몸 안의 내공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콰아앙-!

마치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산적의 몸이 '억'하는 비명과 함께 수십 장 밖으로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그는 저 멀리 숲 속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졌고, 이내 나무가 부러지는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정적.

남아있던 산적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텅 빈 눈으로 무영을 바라보았다. 굽고 있던 닭고기가 모닥불 위로 떨어져 타는 냄새만이 진동했다.

"…괴, 괴물이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자, 산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기세였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공터.

무영은 제자리에 선 채, 허공을 향해 뻗어있는 자신의 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내가… 내가 또….'

또 사람을 해쳤다. 이번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배고프지 않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힘은 그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숲 속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영이 날려버렸던 그 산적이 아직 살아있는 것이었다. 무영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그쪽으로 달려갔다.

산적은 거대한 나무에 부딪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무영을 보자, 그는 공포에 질려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시오, 도사님! 제가 잘못했소! 다시는 악한 짓을 하지 않겠소!"

'도사님?'

무영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도망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무영의 뒤쪽 숲길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영이 고개를 돌리자, 낡은 짐수레를 끌던 노부부(老夫婦)가 이쪽을 보며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아마도 산적들에게 약탈당하기 직전, 무영이 나타나 이 소동을 벌인 것이리라.

노부부는 무영과, 그 앞에 납작 엎드린 산적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무영을 향해 다가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도, 도사님! 저희를 구해주셨군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들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지키려다, 의도치 않게 힘이 폭주했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는 산적을 물리치고 약자를 구한 '협객'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협(俠)인가?'

아니다. 이것은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무영은 보았다. 노부부의 눈에 서린 진심 어린 감사를. 그리고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악인의 비굴한 모습을.

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끔찍한 저주라고만 생각했던 이 힘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 끔찍한 허기와 고독 속에서,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무영은 바닥에 엎드린 산적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다시는 악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저분들 앞에서 맹세하시오."

"예, 예! 맹세하겠소! 다시는! 하늘에 맹세코!"

산적은 노부부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무영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노부부가 "도사님, 성함이라도!" 하고 외쳤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모닥불 위에서는, 잊혀진 닭고기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무영은 또다시 굶주린 채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전처럼 비참하지 않았다. 뱃속은 텅 비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주 작은 온기가 싹트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힘이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한 힘.

그것은 저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은 너무나 미약하고 불확실했지만, 무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몸 안에 깃든 거대한 강물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강호에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산적 떼를 맨손으로 날려버리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고수가 나타났다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더 이상 악인이 발붙이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그를 '이름 없는 협객', **무명지협(無名之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무영 자신은 그 소문을 전혀 알지 못한 채였다.


다음 장에서는, 호남 땅으로 흘러 들어간 무영이 마침내 그의 숙명의 라이벌이자 동료가 될 '남궁혁'과 최악의 형태로 마주치게 됩니다. 정파의 법도와 무영의 본능적인 협의가 충돌하며, 두 사람의 기나긴 악연이 시작됩니다.

 

제 5장: 창과 방패의 만남 (槍과 防牌의 만남)

호남(湖南) 땅, 동정호(洞庭湖)의 물안개가 자욱한 아침.


무영은 이제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았다. 그의 기이한 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것을 다루는 요령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힘을 억누르려 할수록 반발심처럼 튀어나왔지만,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확한 의지를 품을 때면 신기하게도 힘이 필요한 만큼만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강호를 떠도는 그림자였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했고, 그의 손에 의해 크고 작은 악행들이 조용히 해결되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에게서 돌아오는 감사와 경외의 눈빛은, 텅 빈 그의 마음에 조금씩 온기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남성 외곽의 작은 마을, 석가장(石家莊)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영이 주막에 들어가 국수 한 그릇을 시키자, 주모가 그의 낯선 얼굴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젊은이는 외지에서 온 모양인데, 어서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거요. 곧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

"며칠 전부터 사파(邪派)의 혈마채(血魔寨) 놈들이 마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고 있소. 그런데 오늘 아침, 정파(正派)의 거두이신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무사들이 마을에 도착했다오. 곧 두 세력이 크게 붙을 모양인데,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무서울 뿐이지."

남궁세가. 무영은 객잔에서 떠도는 이야기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강호 정파 무림을 이끄는 거대한 세력 중 하나이며, 대대로 정의와 협의를 실천해 온 명문가라고 했다.

'그들이라면 잘 해결하겠지.'

무영은 안심하며 국수를 마저 먹었다.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정파 명문가의 역할일 터.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나려던 그의 귀에, 마을 광장 쪽에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놈! 네놈이 정녕 혈마채의 잔당이 아니란 말이냐!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호기심에 발걸음을 옮긴 무영은, 곧 펼쳐진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광장 중앙에는 남궁세가의 문장이 새겨진 푸른 무복을 입은 젊은 무사 수십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백마(白馬) 위에 앉아 군계일학처럼 기품을 뽐내는 한 청년이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 허리에 찬 화려한 보검까지. 누가 봐도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이름은 남궁혁(南宮赫).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차기 가주로 손꼽히는 정파 최고의 기재(奇才)였다.

그리고 그의 발치 앞에는, 깡마른 사내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그를 포위하고 심문하는 중이었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협객님. 며칠 전 혈마채 놈들에게 짐을 모두 빼앗기고 겨우 목숨만 건졌을 뿐입니다."

"시끄럽다! 네놈의 행색이 수상하고, 눈빛에 사기(邪氣)가 서려 있다! 혈마채 놈들이 정파의 눈을 속이기 위해 첩자를 심어두었다는 정보가 있다. 네놈이 바로 그 첩자가 아니냐!"

남궁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의심스러운 자는 모두 잠재적인 적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작은 의혹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남궁세가가 수호해 온 강호의 법도였다.

무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쓰러진 사내에게서는 혈마채 무리에게서 느껴지던 사악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과 억울함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남궁혁의 위세에 눌려, 마을 사람들 누구도 감히 나서서 변호하지 못했다.

"여봐라! 이 자를 끌고 가서, 혈마채의 본거지를 실토할 때까지 엄히 다스려라!"

남궁혁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무영은 저도 모르게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모든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허름한 행색의 청년, 무영에게로 쏠렸다.

남궁혁은 말 위에서 고개를 돌려, 오만한 눈빛으로 무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눈에는 '근본도 없는 떠돌이가 감히 어딜 끼어드느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무영은 남궁혁의 서늘한 기세에 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 사람은 혈마채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궁혁의 미간이 꿈틀했다.

"네가 어찌 아는가. 관상이라도 볼 줄 아는 게냐?"

"아닙니다. 하지만… 저 사람에게서는 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억울함과 두려움뿐입니다."

남궁혁은 코웃음을 쳤다.

"기운? 같잖은 소리! 강호의 일은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증거와 법도에 따라 행해져야 하는 법! 네놈처럼 감정에 휘둘리는 자들이 많으니 강호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일순, 무영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법도? 질서? 저 눈앞의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법도라는 것이,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두는 것입니까?"

"네 이놈!"

무영의 당돌한 대답에 남궁혁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감히 일개 떠돌이가 자신의 정의에 토를 단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저 미친놈도 함께 잡아 가두어라!"

무사 두 명이 무영의 양팔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무영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몸 안의 내공이 저절로 반응했다.

콰앙!

무형(無形)의 기운이 터져 나오며, 두 무사가 마치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광장이 술렁였다. 남궁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공을 운용한 흔적도 없이, 그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으로 자신의 정예 무사를 튕겨낸 것이다.

"네놈… 정체를 밝혀라!"

남궁혁이 마침내 허리의 보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검기(劍氣)가 무영을 겨눴다.

"나는 저 사람을 데려가게 둘 수 없습니다."

무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사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마치 깨지지 않는 방패처럼.

"오만방자하구나! 네놈이 남궁세가의 정의를 가로막는다면, 너 또한 사파의 잔당으로 간주하겠다!"

남궁혁이 백마 위에서 몸을 날렸다. 그의 검이 푸른 섬광을 그리며 무영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남궁세가 최고의 절기, **'창궁검법(蒼穹劍法)'**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검. 강호의 그 누구도 정면으로 맞받아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절대적인 창(槍)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검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두 손을 들어 허공을 막아섰다.

카아아앙-!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굉음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결과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궁혁의 보검은 무영의 손바닥에 닿지도 못한 채, 그 앞에서 딱 멈춰 서 있었다. 마치 투명하고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지직-!

남궁혁의 애검(愛劍), 북해(北海)의 한철(寒鐵)로 만들었다는 명검의 끝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궁혁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그는 자신의 검이, 상대의 맨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부서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굴욕이었다.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자부심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크으으윽!"

남궁혁은 비명을 지르며 내공을 끌어올려 검을 뒤로 빼냈다.

무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승자의 오만함 대신, 씁쓸함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또다시 이런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광장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정파의 법도를 상징하는 남궁세가의 검.
그리고 이름도 근본도 없지만, 약자를 지키려는 본능 하나로 선 이름 없는 청년의 맨손.

창과 방패의 첫 만남은, 이렇듯 방패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남궁혁은 부서진 자존심에 떨리는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눈에는 무영을 향한 증오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강자에 대한 일말의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최악의 악연. 두 사람의 길고 긴 이야기는 바로 이 순간,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남궁혁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긴 무영의 행적이, 마침내 강호의 모든 정보를 쥐고 있는 '녹의상단'의 신비로운 여주인, '모용설'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녀는 이 정체불명의 고수에게 강한 흥미를 느끼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제 6장: 녹의(綠衣), 그림자를 쫓다

양주(揚州)의 대운하 위, 호화로운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상선(商船) 한 척이 비단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배의 깃발에는 푸른 버드나무 잎사귀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강호를 오가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표식, 바로 '녹의상단(綠衣商團)'의 깃발이었다.


녹의상단은 단순한 상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단과 차(茶)를 팔았지만, 진짜 상품은 바로 '정보'였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그들의 지점과 인맥은, 황궁의 비밀부터 사파의 동향까지, 강호의 모든 혈맥을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녹의상단이 모르는 일은 강호에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상단의 가장 깊숙한 곳, 최고급 비단으로 꾸며진 선실(船室) 안.

한 여인이 창가에 앉아 방금 도착한 수십 통의 밀서(密書)를 읽고 있었다. 연둣빛 비단옷을 입은 그녀는, 마치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맑고 투명한 피부와 그림처럼 고운 이목구비는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진짜 매력은 그 안에 담긴 깊고 총명한 눈빛에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모용설(慕容雪). 녹의상단의 젊은 주인이자, 강호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그녀는 여러 지역에서 올라온 보고들을 빠른 속도로 훑어보고 있었다. 하북(河北)의 마도(魔道) 세력 확장, 사천(四川)의 정사(正邪) 분쟁, 그리고... 호남(湖南)에서 온 한 장의 밀서 앞에서 그녀의 섬세한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밀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혁, 석가장에서 신원 미상의 청년에게 패배. 애검(愛劍) 파손. 상대는 맨손으로 남궁혁의 창궁검법을 막아냄. 해당 청년, 혈마채와 무관한 민간인을 보호하려다 충돌. 사건 이후 홀연히 사라짐. 인상착의: 허름한 옷차림의 십 대 후반, 어수룩해 보이나 눈빛이 맑음. 스스로를 '지나가는 사람'이라 칭함.'

모용설의 아름다운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살짝 휘어졌다.

남궁혁. 오만하기는 해도, 그의 실력이 정파 후기지수 중 단연 으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를, 그것도 남궁세가의 자랑인 창궁검법을 맨손으로 막아내고 검까지 파손시켰다?

"호위무사도 없이 혼자서? 불가능해. 설령 그런 고수가 있다 해도, 강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어."

옆에 시립해 있던 호위무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모용설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몇 달간 각지에서 올라왔던 단편적인 보고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아니요, 조 아저씨. 이 청년, 처음이 아니에요."

모용설은 서가의 다른 서랍을 열어 몇 장의 밀서를 더 꺼내 들었다.

"한 달 전, 하남(河南)에서 산적 떼가 괴력의 사내에게 전멸.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손을 휘젓자 모두가 날아갔다'고 함."
"두 달 전, 낙양(洛陽) 외곽에서 괴력을 지닌 청년이 소동을 일으켰다는 보고. 같은 시기, 사파의 은둔 고수 '검귀'가 흑영문에게 쫓기다 실종."
"그리고... 오늘 보고된 '무명지협'.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모용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흩어져 있던 점들을 이어, 하나의 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검귀의 실종, 정체불명 고수의 등장, 그리고 그가 남궁세가의 정의가 아닌, 힘없는 민간인의 편에 섰다는 사실.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강호의 법칙은 힘의 논리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는 군림하려 하거나, 그 힘을 숨기고 은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청년은 달랐다. 그는 천하를 뒤흔들 힘을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저잣거리의 그림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힘을 과시하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그저 본능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해 움직일 뿐이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힘처럼, 순수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

"상단주님, 이 자를... 어떻게 할까요? 우리 상단의 정보망을 이용하면 금방 찾아낼 수 있습니다."

호위무사의 말에 모용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손가락이 찻잔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요. 섣불리 접근하면 경계할 거예요. 이런 인물은 억지로 당기면 더 멀어지는 법이죠. 당분간은 그림자처럼, 그의 행적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세요.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의 힘이 강호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용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유히 흐르는 대운하의 물결 위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그녀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고요한 강호에, 아주 재미있는 변수가 나타났어요. 태풍의 눈이 될지도 모를... 그런 변수 말이에요."

그녀는 밀서를 내려놓고, 붓을 들어 새로운 지령을 적기 시작했다.

'호남 지역의 모든 지점은 '무명지협'의 행적을 최우선으로 보고할 것. 단, 절대 접촉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말 것. 그의 모든 여정을 기록하라.'

지령은 상단의 비밀 통신망을 통해 각지로 퍼져나갔다.

한편, 남궁혁에게서 벗어난 무영은 자신이 또다시 강호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제 그의 뒤에는, 강호에서 가장 총명하고 예리한 눈을 가진 '관찰자'의 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는 머지않아, 그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운명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다음 장에서는, 흑영문의 추적과 정파의 오해 속에서 부상을 입고 쫓기던 무영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모용설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상단주와 순수한 야수 같은 고수,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시작됩니다.

 

제 7장: 운명의 교차점 (運命의 交叉點)

남궁혁과의 충돌 이후, 무영의 여정은 더욱 고달파졌다.

'정파 명문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굴욕을 안긴 정체불명의 마두(魔頭)'.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흉흉하게 부풀려져 강호에 퍼졌다. 이제 그를 쫓는 것은 검귀의 원수인 '흑영문'만이 아니었다. 무림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정파 무사들까지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무영은 영문도 모른 채 도망자가 되었다. 그는 싸우고 싶지 않아 피했지만, 그럴수록 오해는 깊어졌다. 때로는 자신을 잡으려는 이들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마두의 흉악함'에 대한 증거만 더해질 뿐이었다.

한 달 후, 악양루(岳陽樓)가 보이는 동정호의 갈대밭.


무영은 찢어진 옷소매로 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 전, 그를 마두로 오인한 점창파(點蒼派)의 제자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 와중에 한 제자가 휘두른 검에 팔을 스치고 말았다.

그런데 상처가 이상했다.

검에 스쳤을 뿐인데, 상처 부위가 검게 변하며 지독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 한기가 퍼져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검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크윽..."

무영은 비틀거리며 갈대밭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몸 안의 거대한 내공이 독 기운과 싸우며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독은 뱀처럼 끈질기게 그의 혈맥을 파고들었다. 검귀에게서 물려받은 힘은 강했지만, 독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이대로 가다간 내공이 폭주하거나, 독이 심장에 미치기 전에 먼저 죽을 터였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대로... 끝인가.'

이름도 없이 태어나, 이름도 없이 죽는구나. 그 누구도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채, 마두라는 오명을 쓰고서. 억울함에 눈물이 흘렀다.

그때였다.

"쉿. 움직이지 마세요."

귓가에 속삭이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

무영이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연둣빛 비단옷을 입은 한 여인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소리도 없이.

그녀는 바로 모용설이었다.

그녀는 한 달 넘게 그림자처럼 무영의 뒤를 좇고 있었다. 남궁혁을 압도하는 힘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잡으러 온 하수 무사들에게조차 상처 입히기를 주저하는 모습. 쫓기는 와중에도 굶주린 아이에게 자신의 유일한 찐빵을 나눠주는 모습.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사람은 결코 마두가 아니라고.

추격자들이 갈대밭으로 들어오려 하자, 모용설은 품에서 작은 은침(銀針) 몇 개를 꺼내 소리 없이 날렸다. 은침은 추격자들의 다리 근처 땅에 박혔고, 침 끝에서 피어오른 기이한 향에 추격자들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모용설은 무영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당신이 '무명지협'이라 불리는 분이군요."

무영은 경계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다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독이 퍼진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움직이면 독이 더 빨리 퍼져요. 점창파의 '부골독(腐骨毒)'이군요. 해독하지 않으면 반 시진(한 시간) 안에 뼈까지 녹아내릴 겁니다."

모용설은 담담하게 말하며, 무영의 검게 변한 팔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나 경멸 대신, 안타까움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무영은 처음으로 자신을 '마두'가 아닌, '사람'으로 봐주는 눈빛과 마주했다. 경계심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에게 빚을 진 사람일지도 모르죠."

모용설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작은 옥병(玉甁)을 꺼냈다. 그녀는 옥병에서 붉은 환약(丸藥) 하나를 꺼내 무영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우선 이걸 드세요. 해독제예요."

무영은 망설였다. 강호에서 낯선 이가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모용설은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당신을 해치려 했다면, 그냥 독이 퍼지게 내버려 뒀겠죠. 당신은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저를 믿든, 아니면 여기서 죽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무영은 잠시 그녀의 깊고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어 환약을 삼켰다.

환약이 목을 넘어가자,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솟아올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독 기운이 그 기세에 밀려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당신의 내공으로 독을 몰아내세요. 제가 옆에서 기맥이 뒤틀리지 않도록 도와드리죠."

모용설은 무영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에서, 차갑지만 순수한 내력이 흘러들어와 무영의 폭주하는 내공을 부드럽게 감싸며 길을 터주었다.

무영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시작했다.

거칠고 제멋대로 날뛰던 야수 같은 그의 내공이, 처음으로 섬세하고 지혜로운 조련사의 손길을 만났다. 폭발적인 힘과 정밀한 제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기운이 갈대밭 속에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팔에 퍼져 있던 검은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세상이 다시 맑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여인을 바라보았다. 석양빛을 받아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속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고맙소… 당신이 아니었다면…."

"천만에요."

모용설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대체 누구신지. 그리고 그 엄청난 힘은 어디서 얻으신 건지.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비밀은 강호의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될 거예요. 녹의상단의 이름으로 약속하죠."

녹의상단. 그 이름이 나오자, 무영의 눈이 커졌다. 강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바로 그곳.

순수한 힘을 가진 야수와, 강호의 모든 지혜를 쥔 여인.

고요한 동정호의 갈대밭에서, 마침내 두 개의 운명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혼돈의 강호를 바로잡을 가장 강력한 창과 가장 예리한 방패의 결합. 그 위대한 서막이었다.


다음 장에서는, 모용설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른 무영이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와 비밀을 털어놓게 됩니다. 모용설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흑영문'의 배후와 거대한 음모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무영에게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그의 길을 안내하는 지혜로운 동반자가 되어줄 것을 제안합니다.

 

제 8장: 마음을 열다 (心門을 열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갈대밭의 어둠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있었다. 불꽃은 무영과 모용설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며 흔들렸다. 추격자들은 여전히 모용설의 미혼향(迷魂香)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무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낙양의 뒷골목에서 그림자처럼 살았던 어린 시절, 이름조차 없었던 자신의 존재. 어느 날 밤, 헛간에서 마주친 피투성이의 사내 '검귀'. 그리고 그의 마지막 유언과 함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속으로 쏱아져 들어오는귀혼청강경




이야기를 하는 내내, 무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깊은 고독과 혼란, 그리고 세상을 향한 원망 대신 스스로를 탓하는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모용설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모닥불 빛을 받아, 마치 그의 아픔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깊고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힘은 저주입니다. 제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피하고 도망치는 것밖에는…."

이야기를 마친 무영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그녀가 자신을 괴물처럼 여기고 떠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용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아니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에요.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보검(寶劍)일 뿐이죠. 당신은 지금, 천하제일의 보검을 손에 쥐고도 그 무게 때문에 휘청이고 있는 거예요."

모용설은 곁에 놓아두었던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당신이 검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그저 내공과 무공의 초식일 뿐, 그것을 다스리는 '심법(心法)'을 배우지 못했어요. 끓어 넘치는 강물을 가둬둘 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당신이 남을 도우려 할 때 힘이 제어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당신의 선한 마음이 무의식중에 심법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에요."

무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들었다. 저주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상태를, 이토록 명확하게 짚어낸 사람은 처음이었다.

모용설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리고 '흑영문'…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순히 검귀의 무공만이 아닐 거예요. 검귀는 성격이 괴팍해도 정파에 가까운 인물이었어요. 그런 그가 정사와 사파 모두에게 쫓기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건, 그 배후에 강호의 판도를 뒤흔들려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뜻이죠."

그녀는 무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영 씨. 당신은 더 이상 혼자서 도망만 다녀서는 안 돼요. 당신이 도망칠수록, 흑영문은 당신에게 더 흉악한 누명을 씌워 고립시킬 겁니다. 그리고 결국, 검귀처럼 당신을 없애고 모든 진실을 묻어버리겠죠."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무영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절박함이 묻어 나왔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모용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해야 해요."

"……."

"당신에게는 세상을 지킬 힘이 있고, 저에게는 그 힘이 나아갈 길을 밝힐 지혜가 있어요. 당신이 부딪혀야 할 적이 누구인지, 피해야 할 함정이 무엇인지, 녹의상단의 정보망이 당신의 눈과 귀가 되어 드릴 겁니다."

그녀는 무영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저는 당신이 힘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돕고, 당신의 누명을 벗겨드리겠어요. 그리고 검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강호를 어지럽히는 흑영문의 배후를 함께 밝혀내는 겁니다.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닌, 진정한 '협객'으로서 세상에 바로 서는 거예요."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던 그에게 내밀어진, 한 줄기 빛과 같은 손길이었다.

무영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모닥불에 비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소동을 일으키고, 심지어 남궁혁의 검까지 부숴버렸던 저주의 손. 하지만 이 손을 잡아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왜… 저를 도우려는 겁니까?"

무영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모용설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요… 처음에는 그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지켜보면서 알게 됐죠. 당신의 힘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강호의 수많은 대협들이 '정의'와 '명분'을 외칠 때, 당신은 그저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이 실렸다.

"저는 이 혼탁한 강호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졌어요. 그것이 제가 당신을 돕는 이유예요."

무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아직은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그것은 분명한 동의의 표시였다.

모용설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거칠고 투박한 고아 소년의 손과, 부드럽고 따뜻한 상단 여주인의 손.

그날 밤 동정호의 갈대밭에서, 두 개의 운명이 마침내 하나로 겹쳐졌다. 순수한 힘은 지혜로운 길잡이를 만났고, 예리한 지혜는 세상을 움직일 강력한 검을 얻었다.

'무명지협'의 전설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다음 장부터는 2부 [강호 주유]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모용설의 도움으로 신분을 숨기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 무영. 그는 모용설의 안내에 따라 자신의 힘을 제어하는 훈련을 시작하는 한편, 흑영문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한 첫 번째 임무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실을 쫓던 남궁혁과 예상치 못한 형태로 재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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